본문 바로가기
스터디 열기

그런 회사에서조차

경험으로 쓰겠다고 했으니, 그 경험이 어디에서 쌓였는지부터 밝혀 두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저는 주식회사 위니브를 이끌고 있습니다. 제주에서 시작한 AI·ICT 교육회사입니다. 저희는 오랫동안 인공지능과 소프트웨어를 가르쳐 왔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강의를 하고, 대학에서도 강의를 합니다. 교재를 쓰고, 해커톤과 AI 컨퍼런스 같은 행사도 열어 왔습니다.

이 절에서는 그런 회사의 대표가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저희 회사가 지금 실제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는 1장에서 자세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1. 숫자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프런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저희와 함께 공부한 수강생을 모두 합치면 약 12만 명입니다. 저희가 써서 펴낸 책은 150권이 넘고, 저희가 운영하는 교육 플랫폼 위니버시티를 찾는 사람은 한 달(30일)에 약 2만 명입니다.

한 교육회사가 쌓아 온 숫자로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게 이 숫자들은 성적표보다 시간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이 숫자는 한 가지 일로만 쌓인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강의를 찍어 올렸고, 전자책을 썼고, 사람들이 배우면서 바로 써 볼 수 있는 웹 서비스를 만들었습니다. 행사는 제주에서 열어 왔습니다. 코딩 캠프와 알고리즘 캠프, 웹 컨퍼런스와 AI 컨퍼런스, 사회혁신 해커톤 같은 자리입니다. 배우러 온 사람들이 서로 묻고 답할 수 있도록 커뮤니티도 꾸려 왔습니다. 대학에서는 여러 학교, 여러 학과의 학생들을 만나 왔습니다. 한 사람이 처음 코드를 배우는 순간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남 앞에 내놓는 순간까지, 그 길 곳곳에 저희가 만든 무언가가 놓여 있기를 바랐습니다.

강의 하나를 만들려면 무엇을 어떤 순서로 가르칠지 정하고, 예제를 만들고, 녹화하고, 수강생의 질문을 받아 다시 고쳐야 합니다. 책 한 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고를 쓰고, 코드를 돌려 보고, 틀린 곳을 찾아 고치고, 기술이 바뀌면 다시 씁니다. 12만이라는 숫자 뒤에는 그렇게 만든 강의와 책,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공부한 사람들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저희가 오랫동안 믿어 온 것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어려운 기술을 쉽게 풀어 주면 더 많은 사람이 배울 수 있다. 배운 사람은 그 기술로 일자리를 얻고, 자기 삶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 저희가 만든 강의와 책은 모두 그 믿음 위에 서 있었습니다.

2. 쌓아 온 것의 의미가 희미해진다는 것

그런데 이 책에서 저는 한 가지를 인정하려 합니다. 그런 회사에서조차, 여태까지 쌓아 온 모든 노력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희미해진다는 말을 고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희 강의를 지금도 듣는 분이 있고, 저희 책을 지금도 펴는 분이 있습니다. 다만 예전만큼 선명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어려운 개념 하나를 이해하려면 책을 펴거나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AI에게 물으면 내 수준에 맞춰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줍니다. 예제가 필요하면 바로 만들어 주고, 막히면 함께 고쳐 줍니다. 저희가 오랜 시간을 들여 한 번 만들어 두던 것을, AI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자리에서 새로 만들어 줍니다.

배운 기술로 처지를 바꾼다는 믿음도 흔들립니다. 그 기술로 하던 일의 상당 부분을 이제는 AI가 해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만들 줄 안다는 것만으로는 예전만큼 남과 달라지기 어렵습니다.

저희 회사가 바로 그 예입니다. 저희는 요즘 예전 같으면 사서 썼을 업무용 소프트웨어를 AI와 함께 직접 만들어 씁니다. 문서 편집기도, 표 계산 도구도 그렇습니다. 몇 해 전이라면 저희 같은 규모의 회사가 꿈도 꾸지 못했을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저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회사도, 개인도 비슷한 것을 만들어 씁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게 되자, 만들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자랑할 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새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놓아도 그것을 찾아와 쓰는 사람은 예전만큼 많지 않습니다.

저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 온 것도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소프트웨어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에는 그 기술을 익히는 것 자체가 힘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기술로 만들어 내던 결과물을 많은 사람이 AI와 함께 만들어 냅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저희 회사와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자세히 하겠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입니다. 저는 슬퍼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AI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 때 즐겁고, 저희 회사는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인정하려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상황입니다. 저희가 해 온 일이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예전과 같은 의미를 갖기 어려워졌다는 상황입니다.

3. 교육회사가 먼저 인정해야 하는 이유

교육회사 대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교육회사가 먼저 이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약속을 건네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배우면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저희도 오랫동안 그런 약속을 해 왔습니다. 이것을 배우고 경험하면 자기 처지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식 노동 쪽에서는 그 약속이 많이 사라졌다고 저는 봅니다. 누구나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예전만큼 지켜지기 어려워졌는데도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면, 저희는 배우러 온 사람에게 낡은 지도를 건네는 셈입니다.

바깥에서 교육의 위기를 진단하는 일은 다른 분들이 더 잘하실 것입니다. 저는 안에서, 그 약속을 해 온 사람으로서 말하려 합니다. 숫자가 쌓인 회사일수록 그 숫자를 만든 방식에 기대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더더욱 먼저 인정하는 편이 맞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이 절을 숫자로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막 문을 연 회사의 대표가 "우리가 해 온 일의 의미가 희미해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한 회사의 사정으로 들릴 것입니다. 오랫동안 강의와 책과 행사를 쌓아 온 회사에서조차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쌓아 온 양이 많다고 해서 이 변화를 비켜 갈 수는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희 회사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오래 쌓아 온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인정하고 나면 질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앞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리고 교육회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 시대를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가.

4. 두 방향을 묻는 책

이 책은 그 두 방향을 묻습니다.

하나는 교육회사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지능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시대에 교육은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위니브는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경험을 함께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육회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방향입니다. 일을 해내는 능력의 많은 부분을 살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배우고 무엇을 위해 일하게 될까요. 이 질문은 교육 사업을 하는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무언가를 익혀서 일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마주하게 될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방향을 굳이 나눈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육회사의 방향은 사업의 언어로도 답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팔고, 누구에게 팔고, 어떻게 살아남을지의 문제이니까요. 하지만 그 답을 찾고 나서도 남는 질문이 있습니다. 4장에서 저는 조금 대담한 가정을 하나 해 볼 생각입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풀린 미래라면, 가난의 대물림을 끊는 데 보탬이 되고 싶어 시작한 저희 회사는 무엇을 위해 남아야 할까. 이 질문 앞에서는 회사의 언어가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결국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원하고, 누구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물어야 합니다.

두 질문 모두에 제가 완성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답을 찾는 동안 제가 본 것과 제가 내린 판단은 드릴 수 있습니다. 쌓아 온 것이 희미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 그래도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새로 배워야 하는지까지 가 보려 합니다.

그 길을 어떤 순서로 걸어갈지는 다음 절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수정